[전문가 포럼] 국민 모두에게 건축을 제대로 가르치자
얼마 전 토론회에서 젊은 건축가들이 이렇게 토로했다. “작은 주택을 지을 때 건축주가 지나치게 적은 시공비를 염두에 두니 자연히 부실 시공사가 들어와요. 아무리 많은 도면을 그려주면 뭐합니까. 현장에서는 보지도 않는데요. 저희가 그런 시공사의 한계를 막아주느라 오히려 도면을 쉽게 바꿔주고 있다니까요. 이런 시공회사는 일하다가 도망가 버리기도 해요. 이렇게 생기는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것도 우리예요.”

싼 시공비로 집을 짓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이 부실 시공사를 불러들이는 원인이 된다. 이런 일은 작은 주택을 짓는 현장에서 반복해 일어나고 있다. 그런데도 이를 당연한 일로 여기고 있다.

하이데거는 “지음으로써 거주함을 배울 수 있고 생각할 수 있다”고 했는데, 집을 제대로 짓지 못하면 사는 법과 생각하는 법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하이데거 철학과 집짓기를 아무리 배운들 현실이 위와 같은 이상 아무런 소용이 없다. 건축은 그냥 집이 아니다. 그것은 공동체에 구체적인 형태를 주는 것이다. ‘한 지붕 세 가족’이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지붕으로 덮인 같은 공간에 사람들이 살게 될 때 비로소 가족이 되고 공동체를 이룰 수 있다. 방과 방이 이어져 주택이 생기고, 주택과 주택이 이어져야 마을이 생기고 공동체가 형성된다.

사람들은 왜 집을 짓고 모여 사는지, 건축이 사람에게 어떤 가치를 가져다주는지, 자기가 사는 곳에 저 수많은 건축물이 왜 서 있는지 알아야 할 것이 정말 많다. 그렇건만 우리나라 초·중·고등학교에서는 도무지 건축을 가르치지 않는다. 교과서를 모두 살펴보니 건축에 관한 것은 고작해야 자기 취향에 따라 벽지나 커튼을 고르라는 것이 전부다. 초·중·고교에서 배운 게 없으니 건축학과에 들어온 신입생도 일반 시민과 그다지 다를 바 없다. 한 나라의 교과서라면 내가 사는 집의 창을 통해 보이는 수많은 시설이 지역의 공동체를 이루는 바탕이 된다고 가르쳐야 마땅하지 않은가.

‘건축을 통해 국민이 알아야 할 것이 뭐 그렇게 많은가’라고 반문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배워야 할 것이 참 많다. 거주하고 체험하는 일상의 장소이자 생활공간, 일상적 도구에서 시작하는 환경과 문맥, 지역의 문화를 표현하는 공간, 개인과 사회 공동체를 이뤄가는 방식, 재료로 구축되는 공간, 경제적으로 유용한 자산, 자연환경의 보전과 유지, 전통적 기술과 현대의 첨단기술에 바탕을 둔 산업 등 건축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참 많다. 이뿐인가. 공통된 가치를 실현하는 풍토, 역사, 문화 그리고 미래에 계승하는 유산도 건축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다. 이렇게 보면 건축과 관련해 초·중·고교에서 배워야 할 것은 교과목 전반을 횡단한다. 그런데도 이 나라는 신기할 정도로 건축을 전혀 안 가르친다.

국가는 국민 모두가 각자의 입장에서 ‘함께’ 짓고 사용하며 즐기고 미래에 남길 건축물 짓기를 언제 어디서나 생활 속에서 쉽게 배울 수 있도록 할 의무가 있다. 이런 교육을 건축기본법 시행령에서 ‘기초건축교육’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나는 기초건축교육을 가장 효과 있게 실천할 수 있는 곳은 교육방송 EBS와 한국방송통신대라고 생각한다. 교육방송은 영국 BBC처럼 국민을 위해 깊이 있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지속적으로 개발하는 주체가 되고, 한국방송통신대는 영국의 ‘오픈 유니버시티’처럼 국민 모두에게 품위 있는 건축을 가르치는 기초건축교육기관이 돼주기를 바라고 있다.

또 다른 하나, 실제로 집을 지을 사람, 곧 건축주가 배워야 할 것이 훨씬 더 많고 중요한데도 이것을 제대로 가르쳐 주는 곳이 없다. 그래서 ‘건축주 학교’가 있어야 한다. 한두 신문사가 같은 이름으로 교육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제는 지방자치단체, 건축단체가 주체가 돼 공적으로 설립한 ‘건축주 학교’를 통해 기획과 설계, 시공과 유지 관리에 이르는 건축의 모든 과정과 건축의 공공성을 올바로 배울 수 있게 해야 한다. 지속가능한 사회로 접어든 오늘날, 지방자치단체가 건축단체와 협력해 지역에 올바른 건축을 하도록 가르치는 일에 앞장서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