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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기 감정 억제 ‘상처’로 남아 / 만족 모르는 ‘심판자’와 헤어져야

그러고 보니 나의 고3 아침도 커피로 시작했다. 한 잔, 두 잔, 지금 생각해보니 사발 커피였다. 깨지 않는 잠을 깨우기 위해 마시는 커피는 약이자 독이었다. 늘 잠이 부족했다. 그렇게 커피를 마셔대도 버스 안에서도 자고, 책상에서 엎어져 자기도 했다. 졸릴 때 자고, 배고플 때 먹는, 그 자연스러운 욕구를 거스르는 일은 그만큼 어려운 것이었다.

보도에 따르면, 고교 3학년 절반 이상이 하루에 6시간도 자지 못하는 것으로 확인됐다고 한다. 세상이 그렇게 달라졌건만 지금 고교생의 하루는 80년대를 한 치도 건너오지 못한 것 같다. 머리를 바닥에 대자마자 잠드는 나이에 잠을 줄이는 것은 고문이다. 먹어도 먹어도 배고픈 나이에 아침식사 대신 ‘10분만 더’ 자는 일은 시간과의 전쟁이다. 친구를 좋아하는 마음이 공감력으로 발전하기도 전에 친구를 경쟁자로 여겨야 하는 패러다임은 적을 만드는 삭막한 지름길이다. 그렇게 욕구를 무시하고 원하는 것을 미루고 해야 하는 일을 하다 보면 가장 익숙해지는 것이 감정 억제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철학

내 감정을 억제하고 산 사람이 남의 감정을 존중하기란 쉽지 않다. 내 인사권을 쥐고 있는 사람의 눈치를 보면서 그 사람이 하는 웃기지도 않은 아제 개그에 가짜 웃음을 지어보일 수는 있어도 아픈 사람, 상처 난 사람의 마음을 살피기는 힘들다. 감각도, 감정도 억압하다 보면 무뎌진다. 자기 감각이 무디고 자기감정이 목석인데 어떻게 남의 감정, 남의 판단, 남의 삶의 방식을 공감해주고 존중해줄 수 있을까.

정신이 성장하는 청소년기에 원하는 것을 미루고, 잠도 줄이고, 한눈도 팔지 않고 목표만을 상기하다 보면 어느새 그것이 성격이 된다. 이기적이거나 공격적이 되고, 급해지거나 탐욕적이 된다. 목표가 생기면 급해지고 목표가 사라지면 힘이 빠져 불안해지거나 우울해져 다시 목표를 찾는다. 그러다 보면 삶은 성취가 되고, 성취가 아닌 것은 제대로 된 삶이 아니어서 무시하거나 외면한다. 원하는 것보다는 해야 하는 것을 하게 되고, 내가 원하는 것보다는 목표가 원하는 것을 원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나’는 목표의 전사가 돼있다.

‘어린 시절 상처가 나에게 말한다’를 쓴 울리케 담이라는 학자가 있다. 그녀는 한눈팔지 않고 논문 많이 쓰고 부지런히 살면서 심리학자로서의 경쟁력을 갖추었다. 그러다 40대 중반, 중견학자가 되고 그때부터 여기저기 아프기 시작했다. 몸에 힘이 빠지는 나이가 되자 소화하지 못한 삶의 그림자가 드러나 몸이, 삶이 그동안 받은 스트레스를 터트리기 시작한 것이다. 아프다고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아프지 않으면 보지 못하는 삶의 비밀이 있다. 앓으면서 그녀는 그녀의 그림자 속에서 늘 채근했던, 늘 빨리빨리, 부지런히를 외쳤던 ‘엄마’를 만났다. 일하지 않으면 먹지도 말라고 했던 엄마가 내면의 비판가가 돼 그녀의 삶을 이끌고 있었던 것이다.

성과가 없으면 제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고 채찍질을 했던 엄마의 채찍에 길들어 있었던 어린 시절의 상처 입은 내면 아이를 만난 것이다. 앓으면서 그녀는 그때 왜 엄마가 그렇게 채근했는지를 이해했다. 부지런하지 않으면 살 수 없었던 시절이었으니. 그러고 나서 그녀는 엄마가 임명해놓은 내면의 비판가를 놓아주고 비로소 ‘성과’ 이상의 삶, 소소하지만 삶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작은 행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내면의 비판가가 있다. 내가 하는 일마다 부족하다고, 더 해야 한다고 평가하고 채찍질하는 그는 도무지 만족을 모르는 내면의 정죄자(심판자)다. 나도 몰랐던 내 꿈이 나를 깨고 나오려 하는 사춘기에 내면의 비판가가 활성화되면 자기 뜻대로 살 수가 없다. 아니 자기 뜻을 알아채기조차 어렵다. 보호나 안정보다는 모험을, 규제보다는 자유를 추구할 수 없다. 강물에 배를 띄어 보내듯 언젠가는 그를 보내야 한다. ‘나’를 사회에 적응하게 해줘 고맙다고, 너와의 인연은 여기까지라고 인사하고 보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늘 자기의지를 꺾고 ‘성과’의 의지를 내면화하면서 그의 머슴처럼, 하녀처럼 살아야 한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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