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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근의인문상식] 세상과 만나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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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01-04 22:54:42 수정 : 2019-01-04 22:5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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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족한 생활에 절실함은 줄어 / 욕심 버리면 마음의 근육 커져 요즘 민생고나 보릿고개라는 말을 잘 사용하지 않는다. 이 말은 먹을 것이 부족해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던 가난을 상징한다. 대신 맛집과 여행지를 찾거나 알리는 소식이 넘쳐난다. 이는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고서 삶의 질을 높이려는 풍요를 상징한다. 이렇게 삶의 형태가 가난의 시대에서 풍요의 시대로 바뀌게 되자 언어와 행위에서 차이가 나타났다. 음식을 먹더라도 배불리 먹기보다는 양껏 먹거나 건강을 고려해 조금 먹게 된다. 이로 인해 밥그릇에다 밥을 고봉으로 담는 일은 없어지고 배를 볼록 채우는 식습관은 사라지고 있고 많은 식구가 밥상에서 조금 더 먹으려고 숟가락질을 부지런히 놀리며 다투는 장면이 더 이상 방송에서 보이지 않는다. 이처럼 먹으려고 하면 먹을 것이 주위에 많다 보니 사물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게 됐다. 먹을 수 있다는 사정에 절실하기보다 당연하고 먹을 것이 있는 사실에 평안하기보다는 일상이 됐다. 이러한 당연과 일상은 지금까지 먹어보지 않은 새로운 요리를 찾게 되고 더 비싼 비용을 지불해서라도 맛있는 집을 찾아가는 풍속도를 만들어냈다.

여행도 이제 계절과 기분에 따라 언제라도 훌쩍 떠날 수 있는 상품이 됐다. 욕망이 있으면 그것에 맞는 최적의 상품을 제공하는 관광 산업이 인기를 누리고 있다. 휴양이면 휴양지를 찾고 답사면 유적지를 찾고 자기 성찰이면 순례지를 찾는다. 이는 돈을 모아서 평생 한번 갈까 말까 하다 도중에 이리저리 빠져서 결국 단출하게 어렵사리 떠나는 가족 여행의 추억과 다르다. 한 번의 가족 여행은 가족이 모일 때마다 화제가 되는 공통의 기억이자 가족을 하나로 묶어주는 소중한 추억이었다. 요즘의 여행은 경험을 비교해 더 좋은 곳을 찾는 상품에 지나지 않는다.
신정근 성균관대 교수 동양철학

이러한 변화는 지금 누리고 있는 삶에 대해 절실하고 소중하고 감사하는 태도에도 영향을 끼쳤다. 언제라도 기회가 주어질 수 있으므로 절실함은 줄어들고 더 좋은 것으로 바꿀 수 있으므로 소중함은 얕아지고 언제라도 다른 것을 찾을 수 있으므로 감사함은 엷어진다. 사람이 사물을 접하는 방식이 달라지면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방식에도 변화가 일어난다. 나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절실함이 줄어들고 무엇과 바꿀 수 없는 소중함이 얕아지고 힘들여 이룬 노력에 감사함이 엷어진다. 이처럼 우리가 사물이나 사람을 맺는 방식에서 일회적인 관계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일회적인 관계는 일회용품이 늘어나는 소비 습관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이제 우리는 스치듯 지나가는 관계를 부담 없고 편하다고 하고 깊게 파여서 상처가 남는 관계를 부담이 많아서 불편하다고 생각한다. 더 이상은 사물과 사물의 속살에 들어가지 못하고 겉으로 드러난 표면을 화제로 삼아 이야기하기에 바쁘다.

사람 사이에서 깊은 상처를 받은 사람더러 깊은 관계를 가지라고 할 수는 없다. 그건 엄연히 개인이 선택하는 자유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먹고 일하고 쉬는 모든 삶에서 스치듯 지나가는 가벼운 삶이 가벼울지언정 경쾌하지 못하고 이곳저곳 많이 다닐지언정 상쾌할 수는 없다. 경쾌하고 상쾌하려면 나무의 나이테나 사람의 주름처럼 세상과 접촉하며 흔적이 깊게 파이는 만남을 갖지 않을 수가 없다. 맛집을 찾을 때 찾더라도 이웃돕기 성금 모으기를 명분으로 단식을 하면 내가 먹어야 산다는 절실함과 먹을 것의 소중함과 생산자의 수고에 감사함을 느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웃을 돕는 뿌듯함을 느낄 수 있다. 차를 버리고 하루 종일 걸으며 생긴 물집을 보며 문명의 삶과 소박한 삶의 차이를 느낄 수 있다. 이를 통해 문명이 편하지만 반드시 편리하지 않고 빠르지만 반드시 좋지만 않다는 사실을 만날 수 있다.

세상과 깊게 파이는 만남은 물집과 상처를 낳지만 그 과정을 거쳐 몸의 근육만이 아니라 마음의 근육을 키우게 된다. 마음의 근육은 한 사람이 세상을 제힘으로 온전히 살아갈 수 있는 지혜의 보고이다. 이 지혜의 보고는 스스로 세상과 깊게 파이는 만남을 통해 길어 올릴 때 그만큼 울림이 있고 고귀한 가치를 갖는다. 이것이 풍요의 시대를 살면서 가난의 시대를 돌아보는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신정근 성균관대 교수 동양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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