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인경의 내맘대로 본다

사랑에 대한 기억은 진실일까

유인경 작가·방송인

줄리언 반스의 작품은 빈약한 영어 실력 탓에 국내에 소개된 번역본으로 다 읽었다. 세계 각국의 박물관을 답사한 명사들의 글 모음집 <끌리는 박물관>도 그가 쓴 글이 수록되어 있어 기꺼이 사보았다. 그의 유일한 연애소설이라는 <연애의 기억>이 책방에 나왔을 때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사서 읽었다.

“힘의 절정에 선 소설가… 조용히 마음을 부순다”라고 타임스가 극찬을 보낸 이 작품은 때론 격렬하게, 때론 냉철하게 사랑의 시작과 끝을 되짚는 깊고 서늘한 통찰이 돋보이긴 한다. 하지만 서글프게도 내 나이탓인지 ‘연애’보다는 ‘기억’에 더 집중해서 읽혀졌다. 연애를 기억하는 그의 시선, 자세, 그리고 그가 선택한 사랑의 단어들에 밑줄이 그어졌다.

소설은 이제 일흔 즈음에 접어든 남자가 50여년 전 자신의 첫사랑을 돌이키며 시작한다. ‘제정신이 아닐 정도의 자신감’을 지닌 19세 청년 폴과 ‘다 닳아버린 세대’를 지나고 있는 두 딸의 어머니인 48세의 여자 수전의 관계(너무 당당하게 수전의 집에 드나들고 가족과 식사도 하고 심지어 친구들까지 그 집에 데려가는)는 소년과 청년의 짧은 사랑을 다룬 성장소설 <그해 여름 손님>(<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이란 이름의 영화로 소개됐다)의 동성애보다 더 불편하고 난해했다.

물론 나이에 상관없이 유머감각과 음악과 테니스란 공통취미로 소통을 하고 각각 지루한 모범생 생활과 가정폭력에 시달리던 고단한 삶에서 서로를 구출하려는 동기는 이해가 되지만 그가 일방적으로 기억하는 첫사랑은 불꽃놀이처럼 황홀하고 찬란한 기억이 아니라 서로에게 완벽한 재난이다. 사랑에 빠져 함께 나눈 웃음, 쾌락과 열락의 순간, 추억들에 대한 대가로 수전은 알콜중독에 우울증과 치매환자로 처참하게 쇄락하고 폴은 전도양양한 변호사로서 그에게 적합한 배우자와 꾸리는 평범한 가정 대신 나름 떠도는 고독한 삶을 산다.

반스는 이 책에서 1인칭, 2인칭, 3인칭으로 나눠 주인공 폴이 자신의 강렬했던 단 하나의 기억, 온 인생을 뒤흔든 첫사랑의 기억을 조심스럽게 되짚어 가는 과정을 기록한다. 서서히 두 사람이 돌이킬 수 없는 거리까지 멀어지게 되었는지, 서로에 대한 감당할 수 없는 헌신은 결국 두 사람을 돌이킬 수 없는 고통 속으로 밀어넣고 말았다. 이 책은 그런 헌신에 대한 날카로운 정산서이다. 항상 사랑의 의무에 충실하려는 폴이었지만 점점 망가지는 첫사랑을 보며 이렇게 기록한다.

“가장 열렬하고 가장 진지한 사랑이라도 정확한 공격을 받으면 연민과 분노의 혼합물로 응고해버릴 수 있다는 깨달음. 그의 사랑은 사라졌다, 쫓겨나버렸다, 달이 갈수록 해가 갈수록. 하지만 그가 충격을 받은 것은 사랑을 대체한 감정이 전에 그의 심장에 자리 잡고 있던 사랑만큼이나 격렬하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그의 삶과 그의 심장은 전과 마찬가지로 동요했는데 다만 이제는 그녀가 그의 심장을 진정시켜줄 수 없다는게 다를 뿐이었다.”

물론 소설이긴 하지만 폴이 남긴 기록은 진실일까. 그가 현실, 혹은 진실이라고 믿고 싶은 이야기, 그의 일방적인 시각은 아닐까. 모든 기억은 그것이 아름답건 참혹하건 ‘이야기’가 되면서 적절히 가공조작 과정을 거친다. 더구나 사랑에 대한 기억은 상당히 자기중심적이고 편향적이 되기 마련이다. 그의 전작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역시 주인공은 왜곡된 기억으로 평생을 살아왔다. 뻔뻔하고 나쁜 여자로 규정한 첫사랑은 그가 보낸 치졸한 편지로 평생 상처를 받았는데 그는 그 사실을 눈꼽만큼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래도 그 책에서는 상대를 만나 상대의 해명을 들을 기회라도 있었다.

폴은 자신을 못 알아보는 수전을 마지막으로 병문안 하고 돌아나오면서 그녀의 아름다왔던 모습을 몇분간 떠올리다가 차에 남은 기름과 가장 가까운 주차장을 빨리 찾을 수 있을지, 오늘 저녁 텔레비전 프로그램은 무엇인지로 마음이 옮겨간다. 그런 자신의 마음에 죄책감도 느끼지 못한다. 폴이 끊임없이 찾아 헤매던 ‘사랑의 정의’는 결국 불가능하고 사랑이란 결국 ‘이야기’로만 남는다. 모든 사랑의 끝은 참 황량하고 쓸쓸하다. 그럴듯하게 포장한 기억이 따뜻하게 위로를 줄 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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